처음 자취를 시작하면서 아주 좁은 방인데도 책상을 꼭 들여 놓고는 다짐한 게 있었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꼭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글을 쓰겠다고 말이죠. 그리고 그 약속이 얼마나 지켜졌는지는, 여러분에게 잘 도착하지 않는 뉴스레터 갯수만 봐도 알 수 있고요.
오늘 처음으로 그 약속을 지키고 책상에 앉았습니다. 머리에 번뜩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줄줄 흘러나왔습니다. 가끔 이렇게 뇌가 반짝일 때가 있어요. 귀찮다고 누워 있으면 문장은 낱말이 되고, 낱말은 아주 작은 단위의 형태소가 되고, 형태소는 꿈이 되어 흩어져버립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게 되지요. 그러니 지금 느끼는 것은 지금 써야 합니다.
저는 사진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사진도 찍는 순간의 감각, 날씨, 생각은 거기에만 존재하고 있는 거니까 감동받는 풍경이 있으면 빠르게 휴대폰을 들어 찍으려고 노력합니다. 예를 들면 눈이 흩날리는 밤 열한시의 동네 골목길이나, 추워지기 시작한 늦가을 공원에서 저물어가는 노을 같은 순간이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듯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립니다.
어쩌면 제가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건,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세밀하게 기록해놓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구체적이고, 더 섬세하게 기억하기 위해서. 하지만 내 자신에 너무 몰입하는 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과몰입이 깨지면 우리는 가끔 허무와 마주하곤 하니까요.
그래도 요즘의 저는 '허무하군' 하고 생각하는 대신 '음, 끝이네!' 하고 툭툭 털어버리는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오래 허무해봐야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내가 내 몸 책임지며 살아가는데 손해 좀 보면 어떻냐 싶기도 하지만요. 여러 생각이 들지만 최대한 자중하는 중입니다. 그저 잘 먹고, 잘 놀고, 잘 웃으면서 지내려고 합니다.
가끔 센티멘털한 날들도 있겠지만, 그런 날에는 감자 샐러드를 해 먹으면 됩니다. 감자를 삶는 시간동안 지나치게 감성적인 내 정신머리도 거기 퐁당 넣어서 삶는 거죠. 포슬포슬하게 감자가 익으면 찬물에 넣어 껍질을 벗기면서 싱크대 수챗구멍 사이로 잘 삶아진 나를 흘려보냅니다. 그리고 이두박근에 힘을 세게 주고 감자 으깨기 기구로 감자를 팍팍 으깨줍니다. 그러면 나의 센티멘털한 마음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기억나지도 않을 거예요. 감자 샐러드는 거기서 끝이 아니니까요.
더 쓰면 감자 샐러드 예찬론자가 될 것 같아서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그래도 한 마디만 더 하자면, 감자 샐러드를 만들 때는 후추를 많이 갈아 넣어보세요. 톡 쏘는 알싸함이 기분을 풀어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