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의미 없는 상상을 해봅니다.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혼자 하는 것은 아니고 보통은 친구인 H와 함께 하던 상상이었어요. 아주 오랫동안 친구를 하다가, 둘 다 늙어서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는데 죽게 되면 어떨까. 우리의 상상은 보통 가장 희망찬 버전으로 진행됩니다. 병이 들어서 끙끙거리다 죽거나, 불의의 사고로 금방 죽어버리는 건 시나리오에 없죠. 상상이라도 행복하고 편안하게 죽는 것이 나으니까요. 그렇게 상상하며 보내는 시간을 우리는 종종 '희망 고문'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단둘이 만날 때보다 셋이 만날 때가 더 많았습니다. H는 술을 못했고, 주와 나는 술을 좋아했으니까요. 누군가 술을 먹지 않아도 다같이 즐겁게 놀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다 마음이 힘든 날이면 비교적 집이 가까운 H의 집으로 갔습니다. 자고 온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늦은 시간까지 맥주를 콸콸 들이부으면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새벽이 되는 건 금방이었어요. 그럼 다들 비틀거리며 집에 가거나, 술을 더 마시고 아예 바닥에 늘어져서 잤습니다.
적다 보니 저의 20대 초반은 미친듯이 술독에 빠져서 사는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뇌가 알코올을 제대로 분해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42시간이라는데, 저는 제정신이었던 날이 거의 없었다고 봐도 맞겠네요.
어쨌든 일하는 곳도 같고, 성격도 비슷하고, 만나는 사람들도 비슷한 셋이 모여봐야 하는 얘기라곤 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오픈이 어땠고, 미들이 어땠고, 누가 어땠고 하는 이야기들이었죠. 그러다보니 권태롭기도 했습니다. "아, 재밌는 얘기좀 해 봐"라고 누군가 운을 떼면 그제야 만약에 게임이 시작됩니다. 만약에 외계인이 진짜로 있다면 어떨까, 외계인이 있는건 맞는지, 만약 오래 사귄 애인이 외계인이었다면 어떻게 할 건지, 내가 외계인인데 너네한테 말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나 이제 곧 M-3941 행성으로 돌아가야 해"라며 충격 고백을 하면 어쩔 건지. 그런 이상한 이야기들을 하다가 맥주를 네 캔쯤 먹고 나면 항상 물었습니다.
"만약에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거야?"
만약을 가정할 때 가장 잔인한 예시인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죽고 나면 그들을 볼 수 없을 테니 궁금했습니다. 당장 죽을 예정인 것은 아니지만, 죽음은 때론 사고처럼 일어나니까요. 그러면 H는 그런 말좀 하지 말라고 하다가. 단둘이 만나 술을 마시던 어느 날에 갑자기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럼 너를 따라 죽을래"
좀 놀랐던 것 같아요. H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효율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었으니까요. 가끔 약한 모습도 보였지만, 그건 우리가 친구라서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내가 죽으면 따라 죽고 싶다고 할 줄은 몰랐습니다. 오히려 남아서 네 장례식을 지켜본다고 할줄 알았어요. 그러고 나서 우리는 서로가 없으면 인생이 재미 없을 것 같다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냉기가 식어가는 맥주를 옆에 두고서. 진지한 이야기를 몇 마디 더 하다가, 그럼 주는 어떨까. 주는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H는 조금 고민하다 "걔는 우리가 죽어도 매년 우리의 기일을 챙기면서 살아가겠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누군가는 살아야 우리의 기일을 챙겨줄 수 있겠지요.
지금은 H와 연락하지 않고 지냅니다. 그래도 가끔은 술 취한 그날 밤의 대화가 떠올립니다. 약간 넓은 오피스텔 방 한 구석에서 은은한 무드등을 켜 두고 시시덕거리던 그날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