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만화책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학교가 끝나면 항상 자기 집으로 저를 초대했어요. 부모님은 거의 안 계셨던 것 같고요. 우리는 친구의 작은 방 한쪽에 누워서, 엎드려서, 앉아서 만화책을 읽었습니다. 당시에는 고전 문학을 만화책으로 다시 출간한 시리즈도 유행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읽은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첫사랑이니, 로맨스니 아직 겪어보지 못하고 활자 속의 두근거리는 감정만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제게는 만화책 속에서 만나는 모든 등장인물들과 사랑이 놀랍고 신비로운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특히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히스클리프의 포악한 사랑은 더더욱 충격적이었죠. 어린 마음에도 '이게 사랑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부터 로맨스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고 또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야기들이 세상에 너무 많았으니까요. 그러다가 <캔디캔디>를 만나게 됐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많은 분들은 <들장미 소녀 캔디>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기억하실 것 같습니다. 글을 적으면서 찾아보니 1983년 MBC에서 115부작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고 되어 있군요.
어쨌든, <들장미 소녀 캔디>를 보신 분이라면 캔디스 화이트 아드레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실 겁니다. 캔디스, 작품의 주인공이자 우리의 주근깨 소녀 캔디. 그녀에게는 이상하리만치 고되고 슬픈 일들이 몰아칩니다. 첫 사랑이자 힘든 시간을 이겨내게 도와 주었던 안소니, 성바오로 학원의 문제아 테리우스, 언제나 힘들 때면 우스꽝스러운 발명품으로 힘든 시간을 이겨내게 해 주었던 스테아까지. 그녀의 인생에 하나씩 슬픔을 안겨주었죠. 초등학교 때 <캔디캔디>를 처음 읽었을 때는 그냥 재밌다! 정도의 감상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좋은 기억에 다시 <캔디캔디>를 읽고 싶었습니다. 마침 생일이었던 덕에 친한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게 됐고요.
하지만 다시 만난 <캔디캔디>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행복한 이야기는 두꺼운 양장본 6개를 합해서 한 권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았어요. 캔디는 주변에 좋은 사람이 아주 많지만, 동시에 나쁜 사람도 아주 많았고, 캔디를 이유없이 사랑하고 지지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주 큰 문제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런 순정 만화는 보통 남자 주인공과 이어지는 걸로 끝나죠. 그 때의 순정만화들은 더더욱 그랬고요. 그런데 캔디는 첫 사랑인 안소니를 사고로 불행하게 잃고, 성 바오로 학원에서 함께 했던 테리우스 또한 다른 여자에게(*이 이야기는 너무 길어서 따로 적지 않겠습니다. 긴 사정이 있습니다...) 보내주게 됩니다. 그리고 캔디는 자신이 자란 고아원으로 돌아와서 지나온 모든 추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죠.
다시 읽고 나니 씁쓸한 게 아니라 어이가 없었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마무리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으니까요. 디즈니식 '해피 엔딩'에 갇혀 있던 저에게는 산뜻 충격적인 엔딩이었습니다. 물론 캔디스 아드레이 화이트가, 아니 그냥 거창한 이름 없이 '캔디'가 불행하진 않을 거예요. 그녀는 자신의 키다리 아저씨도 만났고, 진정으로 원하던 곳으로 돌아갔으니까요.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제가 약간 불행해졌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사랑이 이뤄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 같아요. 캔디가 테리우스랑, 혹은 다시 만난 언덕 위의 왕자님인 아저씨와. 누구라도 좋으니 캔디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만큼 캔디를 더 사랑해주고 위해주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왜냐면 그게 제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해피엔딩이었으니까요.
한참을 벙쪘습니다. 그게 정말로 해피엔딩일까?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잘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던 것 같아요. 이제 해피엔딩이라는 건 대체 어떤 건지, 멋진 남자주인공과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것만이 해피엔딩인지. 나는 왜 그런 것들을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오래 생각해도 알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이 뉴스레터를 다 적고 나서도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가장 명확하고 행복한 엔딩이라고 생각할테니까요. 그래서 결국에는 내 자신이 안타까워졌습니다. 혹, 내 인생의 해피엔딩이 다가오고 있어도 알아채지 못할까 걱정이 됐어요. 하지만 이 글을 적고 나서는 그럴 일이 없을 거예요. 없길 바랍니다. 부디 그러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