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포 정리
2년간 살던 자취방을 정리하면서 사소한 이별들과 마주하는 요즘입니다. 골목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동네를 2년이나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생경해요. 항상 가던 골목 길 끝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해 그 근처를 기웃거리면 생애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지곤 합니다. 그렇게 익숙하기도 하고 새롭기도 한 동네를 허둥지둥 목격하면서 여전히 이곳에 대해 나는 잘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동안 글을 적는 게 힘들었습니다. 의식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기도 했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 적을 때면 사소한 우울이 덮쳐왔습니다. 지난 날 나의 문장이 엉망이라 보기가 고역이라던 누군가의 나쁜 말이 자꾸 떠오릅니다. 그렇다고 그가 일부러 나를 무작정 비난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가 보기에 글이 좋지 않아 그리 이야기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상대의 의도와 목적이 어떻든, 우리의 사이가 어떻든, 나쁜 말은 마음에 오랫동안 남고 그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더군요.
꾸역꾸역 나쁜 말들을 삼켜 가며 다닌 직장도 그만두었습니다. 아침마다 눈을 뜨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남들은 다 하는 걸 못 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 때면 버석하게 마른 얼굴 위로 자꾸만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돌이켜 보면 우울한 나날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도 출근은 해야하니, 울면서 나갈 준비를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퉁퉁 부은 얼굴로 자취방에서 홀로 나가 역으로 가다 보면 항상 지나는 동네 작은 옷가게가 있습니다. 쨍한 연두색 간판 위에 붉은 고딕체로 'HANSTAR FASION' 이라고 적혀 있는 가게. 여담이지만, 처음에는 한스타가 아니라 햄스터 패션인 줄 알았어요. 어쨌든 달갑지 않은 출근길을 상기시켜주던 가게는, 퇴사 이후 그저 특이한 옷가게로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퇴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본가로 돌아갈 결심을 마치고서는 자취방을 별장처럼 이용했습니다. 애인과 주말마다 자취방에서 만나 놀며 시간을 보내고, 주중에는 본가에 가서 엄마와 강아지, 고양이와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니 한스타 패션의 '점포정리' 글씨를 발견한 것은 아주 늦은 순간이었죠.
어둑한 창 유리 위에 붉은 매직으로 '점포 정리' 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이 년간 터줏대감처럼 있던 그 옷가게가 텅 비어 아무것도 남지 않을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고, 점포 정리라는 말에 혹한 주민들이 슬쩍 가게 문을 열어 들여다볼 장면도 상상해보았습니다. 그러고는 내가 간직한 나쁘고 슬픈 경험들도 한데 모아 정리해버릴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작가 디디의 '나쁘고 슬펐던 기억 점포'를 정리하는 거지요. 한 곳에는 A회사를 다니며 선임에게 폭언을 듣고 집에 가는 길 엉엉 울며 엄마에게 전화를 했던 기억이 있겠네요. 다른 한 켠에는 B회사를 다니며 밤 열 한시까지 야근을 하며 작업을 하고, 막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뛰었다가 우당탕 넘어져 무릎이 박살난 기억도 있고요. 언젠가 강성(*이전에 서비스직을 할 때 진상인 손님을 지칭하던 표현)에게 폭언을 듣고 스태프 대기 공간에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던 순간도 있을 거예요.
점포 정리라는 말에 혹한 누군가가 제 기억과 상처를 가지고 밖에 내다 버려주었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 떠올려보면 힘든 순간보단 그 이후가 더 기억에 남네요. 엉엉 울며 엄마에게 전화를 한 날, 엄마는 다정한 목소리로 "얼른 집에 와서 맛있는 거 먹자. 엄마가 너 좋아하는 감자 조림 했어."라고 위로를 건넸습니다. 매일 야근을 하고 막차를 향해 뛰었을 때는 어두운 밤까지 옆자리를 지켜주던 든든한 동료들이 있었습니다. 때로 누군가는 연장해서 일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제 돈을 써가며 함께 저녁을 먹어주기도 했고요. 시덥잖은 농담을 하며 회사가 망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너와 함께 다녀 좋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요. 손님에게 욕을 얻어먹고 울던 날엔, 매니저가 어깨를 토닥여주며 자기가 해결할테니 쉬다 퇴근하라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습니다. 어쩌면 싫고 괴로운 순간들을 우리가 견디며 살아가는 것은 그 이후에 찾아오는 다정한 기억들이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그러니 오늘도 좀 더 견디며 살아보려고 합니다. 점포 정리는 조금 미뤄두고 말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