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언제나 하나
좋은 날입니다. 비상계엄이 내린 지 4개월만에 일상이 다시 평화를 찾았습니다. 저는 그간 비일상적이고 비상식적인 사람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카페일 뿐인데도 말이죠. 아침부터 붉은 색으로 잔뜩 치장한 이들이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들어와 다짜고짜 화를 내거나, 순서를 지키지 않고 내가 먼저니 니가 먼저니 하며 계산대 앞에서 싸우거나, 제 말은 듣지도 않고 카드를 홱 뽑아버리는 일도 잦았지요. 물론 이런 것들이 비단 정치색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헌법 재판소의 판결이 하루 이틀 밀리면 밀릴수록 재판소 앞에는 더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탄핵을 반대한다는 농성 소리가 가득하고 붉은 색의 깃발이 광장을 채우는 걸 보고 있노라면, 내 자신이 아주 무력해지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저들도 각자의 신념을 지키겠다며 광장에 나오는데, 내가 하는 거라고는 반복적으로 음료를 만들고 커피를 내리는 일뿐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요.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다른 지점에서 마감을 하던 날이었습니다. 판결이 밀리는 동안 불행하게도 제 삶은 항상 비슷했어요. A지점에서 오픈을 하고, B지점에서는 마감을 하면서 하루에 두 번 풀타임으로 일하기도 했고요. 열심히 마감을 준비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마감하는 동안 울리는 '딸랑'소리는 달갑지 않았던 적이 더 많아 질끈 눈을 감았습니다. 제발 진상만 아니어라, 하고 돌아섰고요. 돌아선 곳에는 앳된 얼굴의 청년들이 다섯 명 서있었습니다. 키오스크에서 각자 주문을 기다리기에 포스에서도 주문이 가능하시다고 안내했고, 다들 무거운 가방과 색색의 깃발을 자리에 내려놓으면서 한숨을 크게 쉬었습니다. 어딘가 지친 기색이었어요.
주문받은 음료를 만들던 중에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는데, 너무 지치는 것 같아요."라는 말이 들렸습니다. 필히 나와 같은 것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겠거니 싶어 엿듣는 모양새였지만 그들의 대화에 귀기울였습니다. 대자보를 한번 더 붙이면 어떻겠냐고, 행진에 못 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행동이 뭐가 있을지 같이 고민해보자며 열띤 토론을 하고 계셨어요.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내가 뭐라도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의 노력에 숟가락을 얹는 거라 말해도 상관없었습니다.
생전 쳐다보지도 않던 과자 하나를 집어 결제했어요. 그리고는 작게 쪽지를 써 붙였습니다. 응원하고 지지한다고. 같이 힘내자고 말이죠. 그때는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짧지만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진심을 꾹꾹 눌러담아 적었고,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전해드렸습니다. 갑작스러운 선물에 누군가는 박수를 쳐 주었고, 누군가는 과자를 꼭 껴안은 채로 조금 우셨던 것도 같아요. 고작 3천원도 안 되는 값싼 과자였지만, 아마 내가 전하고 그들이 받은 것은 고작 과자가 아니라 희망이었겠지요.
그리고 그 희망이 지금은 진실된 결과로 돌아왔습니다. 늦었지만 세상이 바로잡히는 순간이지요. 오늘 뉴스를 보며 인상깊었던 문장이 몇 개 떠오릅니다. 역사는 역류하지 않는다. 역사는 전진하고, 후퇴하지 않는다. 긴 새벽이 끝났습니다. 많은 이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사랑으로 이루어진 봄이 드디어 찾아왔어요. |